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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교3

다잘난시대 2016. 11. 28. 12:24

이슬람교의 기원과 실상을 밝힌다 3 세상읽기

2004.12.28.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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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교의 기원과 실상을 밝힌다 

 

노우호 목사님

 

로만 카톨릭이 하디자와 바라카를 보내어 공작한 것은 일반 사람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교황청의 한결같은 소원은 예루살렘 솔로몬 성전 터에 교황청을 세우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사업을 추진하는 데 걸림돌이 될 사람들이 첫째는 정통파 유대인들이었다.

한편 여러 지방에 세워 놓은 수도원으로부터 많은 정보가 교황청에 전달되어 갔다. 로만 카톨릭은 일차적으로 이 세상에서 없애야 할 사람들 중에 일차적으로 정통파 유대인들과 카톨릭 교리를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이었다. 이러한 사람들을 제거하는데 직접 나서서 피를 흘리게 되면 로만 카톨릭의 모양이 좋지 않으니까 그 일을 대신해 줄 인물을 구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악한 일을 맡을 사람으로 마호메드라는 인물을 만들어 낸 것이다.

전 아랍사람들을 한데 묶어 교황청에 복종하게 할 영웅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그 영웅으로 하여금 무력으로라도 우상을 없애고 전 아랍을 하나로 묶어서 교황에게 순복하게 하고 또 예루살렘을 교황청에 바칠만한 인물을 만들어 낸 것이다.

교황청에는 이 모든 일을 추진할 한 여인을 택하였는데 그녀가 바로 40대 돈 많은 과부로서 마호메드의 아내가 된 여인이었고 그녀의 사촌 오라버니 되는 바라카였다. 처음에 그녀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카톨릭 교회에 헌납하고 수녀원에서 은둔 생활을 하면서 기도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그녀가 어느 날 특수 임무를 받아서 세상으로 나오게 되었고 자금지원은 교황청이 책임지기로 하고 하디자와 바라카가 특수 임무를 수행하게 된 것이다. 마호메드가 하디자와 바라카의 지도를 받는 중에 특별히 어거스틴의 책을 많이 읽으면서 철저한 훈련을 받게 했다.

사탄은 이러한 작업으로 통하여 이스마엘 자손들에게 복음이 들어가지 못하게 공작하고 있었고 카토릭은 정통파 유대인들을 제거하는 일과 카톨릭 교리를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을 제거하는 꿈을 꾸었고 마호메드는 아무 것도 모르고 이용당하고 있었다. 이러한 일들이 준비되고 진행되는 동안에도 카톨릭의 수도사들은 끊임없이 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날 것이라고 사전 풍문을 퍼뜨리고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풍문이 지금까지도 그 순진한 이스마엘 자손들에게는 사실인 것처럼 왜곡되어 수많은 선교사들이 노력을 헛 수고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어느 날 마호메드가 메카 외각에 있는 히라산의 어느 동굴에서 성스러운 환상을 보았다고 하는데 그 모든 환상은 언제나 바라카가 해석해주는 대로만 기록된 것이다.

이 때 보았다는 환상들을 기초로 하여 오늘날 코란이란 책이 만들어졌다.

마호메드가 보았다는 마리아에 대한 환상과 교리로 인하여 카톨릭을 신봉하는 왕들로부터 이슬람은 보호를 받았다. 그러나 그 외에 마호메드가 쓴 다른 문서는 단 한 페이지도 출판된 것이 없다. 혹 있다면 오늘 날 이슬람 최고 지도자(아야톨라)들의 손에 있다고 보고 있다.

이 문서에는 이슬람 교리를 만들어 가는데 교황청이 무슨 역할을 했는지가 소상하게 나와 있어서 일반인들에게는 절대 비밀에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물론 교황청 비밀문서 보관소에도 있고 이슬람 최고지도자들의 손에도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이러한 문서에는 이 땅에서 어떻게 하면 정통파 유대교와 카톨릭 교리를 반대하는 기독교를 말살할 것인가 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어서 이 문서가 외부에 유출되면 두 종교는 다 큰 타격을 입을 수 있기 때문에 서로 견제하면서 서로 조심하고 있는 것이다.

마호메드는 632년에 죽었고 그가 죽고 나자 이스람교는 오히려 더 번창하게 되었다.

교황청의 목적대로 아랍의 모든 유목민 부족들이 알라 신과 그의 선지자 마호메드의 이름 아래 통일되어 갔다. 그 때까지 아랍 사람들의 속내를 알지 못한 교황청은 이슬람교가 북아프리카 지역을 침략하여 통일시키는 일까지 승인하여 주었고 심지어 자금까지 대어 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이 진행될 때 교황청에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조건을 약속받고 재정을 지원했다고 한다.

첫째 정통파 유대인들과 카톨릭 교리를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을 제거할 것

둘째 어거스틴 수도사들과 로마 카톨릭 교회는 항상 보호할 것

셋째 교황청을 위하여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카톨릭에 돌릴 것 등이었다.

이러한 조약이 체결되고 자금이 지원되자 이슬람교는 북 아프리카 전역을 다 쓸어서 통일시켰다. 성지를 순례하면서 시내산 밑에 있는 성 카타리나 수도원 안에 들어가서 불타는 떨기나무 있는 곳에서 잘 살피면 그 곳 수도원 첨탑에 기독교의 십자가와 이슬람교 반월 표지가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이 무심코 그냥 지나 올 수도 있고 자세히 보면 거기서 이슬람과 카톨릭이 화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로만 카톨릭과 이슬람은 불가침 조약이 있고 화평하게 잘 지내고 있으면서 그들의 공동의 적은 여전히 정통파 유대인들과 카톨릭 교리를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로만 카톨릭은 종교재판이라는 무시무시한 방법으로 사방에서 기독교인들을 학살하였고 이슬람은 동방에서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을 무차별 죽여 없앴다. 세월이 흘러서 아랍사람들의 이슬람 군대는 마침내 로만 카톨릭에 진 빚을 갚아야 할 때가 도래하였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승리를 맛 본 아랍 사람들은 교황청의 군사력이 별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랍의 군대를 막아 낼 어떤 군대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교황청의 교활하고 악한 계획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교황청에서는 아랍 사람들이 더 이상 교황의 말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슬람지도자들은 교황청이 그렇게 손에 넣고 싶었던 예루살렘의 중요성을 깨닫고는 성전 산을 자신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예루살렘이란 도시는 참으로 파란 만장의 역사를 가진 도시였다.

아라비아인은 이 도시를 쿠드스(신성한 도시)라고 부른다. 예루살렘은 BC 3000년대 말경에 여부스라는 가나안인(人)의 한 부족이 차지하고 있다가 이스라엘 왕 다윗이 탈환하여 예루살렘이리고 했다. 여부스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을 당시의 이 도시는 우루살림이라고 불렀는데, "평화의 도시"라는 의미이다. 다윗 왕이 여부스인을 쫓아내어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다음에는 솔로몬왕이 궁전과 성전을 지었고, 일찍이 다윗이 건립한 이스라엘의 하느님 제단 앞에 야훼의 성전을 건립하였다. 이 무렵에는 주민들도 늘어났고, 도시 둘레에 성벽도 만들었다.

BC 935년 왕국이 이스라엘과 유대로 양분되자 예루살렘은 남방 유다의 중심지가 되었다. BC 586년 신(新)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느부갓네살)가 예루살렘을 파괴하였으며, 시민들을 바빌론으로 끌고 가서 BC 538년까지 억류하였다(바빌론의 포로). 그 후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이들을 석방해 줌으로써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야훼의 성전도 재건하였으나, 옛날의 번영을 되찾을 수는 없었다. 그 후 여러 차례 파란을 겪은 끝에 BC 63년 폼페이우스가 거느린 로마 군이 성벽을 파괴하고 이 도시를 점령하였다. 이때부터 예루살렘은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나, BC 37년부터 헤롯 왕이 이 곳을 점령하고 야훼의 성전을 재건함으로써 솔로몬 왕 이후의 번영을 되찾았다.

그러나 헬레니즘 문화의 색채가 농후한 것이 옛날과 다른 점이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혔을 무렵(AD 30년 4월)에는 처형장인 골고다 언덕과 매장지가 북서부의 성벽 밖에 있었는데, 10여 년 후에는 이 지역을 둘러싼 새 성벽이 만들어졌다.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가 70~71년에 이 도시를 공격함으로써 헤롯 시대의 번영은 사라졌다. 유대교도들은 헤롯이 지은 성전의 벽, 나중에는 그 성벽을 "통곡의 벽"이라 이름짓고 이곳을 찾아가서 통탄하는 풍습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에도 유대교도의 반란이 거듭되었기 때문에 로마인은 135년경 예루살렘은 파괴했으며, 예루살렘을 콜로니아 아이리아 카피토리나라 부르고 직속지로 삼아 유대교도들을 몰아냈다. 로마가 그리스도교 국가가 되자 예루살렘은 그리스도교도의 순례자로 붐비었으며, 콘스탄티누스 1세(재위 306~337)의 명령으로 그리스도의 성묘(聖墓) 등에 최초의 교회가 건립되었다. 614년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호스로 2세가 비잔틴 제국군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뒤, 많은 교회를 불사르고 다수의 시민을 끌고 갔다.

마호메드가 죽은 후 불과 7년째가 되는 638년 이슬람교로 단결한 아랍인이 이 곳을 함락시켰으며,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도 비잔틴 제국에서 이탈하여 이슬람교 국가의 일부가 되었다. 현재 바위사원에 있는 큰 바위는 마호메트가 꿈에 대천사 가브리엘의 안내로 알라신(神) 앞까지 갔다는 이른바 승천(미라지)의 장소로서 신성시되고 있다. 아랍인들은 솔로몬의 궁전이 있던 곳에 "아득한 회교사원(알 아크사 마스지드)"을 지었으며,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프, 압둘 말리크(재위 685~705)가 이 곳에 바위 돔 사원을 건립하였다.

마호메드가 바라카의 지도을 받으면서 코란을 기로하는 중에 큰 거짓말을 삽입하였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잡아 제사를 하라는 명령을 듣고는 모리아 산으로 가서 이삭을 빼돌리고 이스마엘을 잡아서 제사를 드렸다고 거짓말을 썼다.

이때부터 이슬람교도들은 이 예루살렘을 성지로 존중하였다. 한 때 이집트의 파티마왕조의 칼리프, 하킴(재위 996~1020)이 그리스도의 성묘를 비롯하여 그리스도교도의 몇몇 성지를 파괴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는 비잔틴 제국의 도전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예루살렘을 차지하려고 그렇게 공을 드렸던 교황청에서는 여전히 예루살렘을 포기할 수 없어서 마침내 1099 년에는 제1차 십자군이 성시(聖市)를 침략하였으며, 이슬람교도와 유대교도의 대학살을 자행하고,이 곳을 수도로 하는 예루살렘 왕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1187년 이집트에 아이유브 왕조를 건설한 살라딘이 이슬람 세력을 모아 이를 탈환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에 걸친 십자군 원정이 있었으나 1229년 2월~1244년 8월까지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와의 화의(和議)로 이 땅을 회복한 적이 있을 뿐 성지 탈환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랍인들은 간덩이가 커져서 이제는 유럽을 공격하겠다고 선언하고 나섰다. 교황청에서는 발끈하게 되었고 전쟁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카톨릭의 군대와 아랍의 군대는 상당히 오래 동안 전쟁을 하게 되었다. 전쟁은 수 세기가 흘러갔지만 예루살렘은 교황의 손에 넣을 수가 없었다.

아랍 사람들은 알라 신의 이름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고 마침내 터키가 아랍인들이 손에 넘어갔고 뒤를 이어서 포르투칼과 스페인까지 점령당했다. 그들이 포르투칼을 어느 지역을 지배하고 있을 동안에 그 곳 지명을 마호메드 딸의 이름을 따서 "파티마"라고 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그 파티마 시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지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아랍군대는 고국을 떠난지 수년이 걸리는 전쟁을 치르면서 마지막으로 교황청을 공격할 채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 당시에 아랍군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야기되었는데 그것은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수 있는 군수물자를 조달할 수가 없었고 그들은 조국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들이 이탈리아를 침략하기 이하여 사르디니아의 코르시카 섬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들에게는 양식이 떨어져 가고 있었다.

진퇴 양난에 빠진 아랍 군대와 불안에 떨고 있었던 교황청 사이에 선택의 길은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 방법은 죽기 살기로 싸우는 방법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 싸움은 어느 편도 그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도박이었다. 어느 편이든 다행이 이기면 문제가 쉽게 되겠지만 지는 날에는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장날 판국이 되었다.

둘째 방법은 적당한 선에서 휴전을 하고 협상 테이블에 나아가는 것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지만 양쪽이 다 타협과 협상으로 가닥을 잡았고 마침내 협상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 때 중재자로 나선사람이 그 유명한 성 프란시스(Fracesco ; 1182-1226.10.3)였다.

그들은 공식 협상을 통하여 이른바 정교조약(Concordates)을 조인하고서 휴전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때 맺어진 그 조약에는 터키를 카톨릭에 양보하고 카톨릭 쪽에서는 레바논을 아랍영토로 인정할 것이며 또한 로마 카톨릭이 아랍국가에서 활동할 수 있는 한 회교도들 또한 아무런 간섭없이 이슬람 사원을 세울 수 있게 하는데 동의했다. 그리고 그들은 상호의 종교를 독립된 종교로 인정하고 공동의 적이 되는 정통파 유대인들과 카톨릭 교리를 반대하는 기독교를 공동의 적으로 간주하여 이를 제거하는 일에 공조하기로 약속하여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렇게 하여 사탄은 아랍 열국에 있는 불쌍한 이스마엘 자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손을 써 놓았다. 이렇게 정교조약이 체결된 후로 이슬람의 아야톨라 즉 이슬람교의 최고 성직자들과 이슬람 수도사들은 철저하게 통제하기 시작했다.

한편 교황청은 이슬람과 유대인 사이를 이간질하는 공작을 계속하는 한편 성경과 역사를 바르게 전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을 무차별 하게 죽였다. 이른바 그 무시무시한 종교재판에 의하여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은 목숨을 잃었다.

이슬람교에서는 젊은 사람들이 성경을 접하게 되면 비밀을 깨닫게 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게 되었고 카톨릭에서도 역사를 바르게 전하여 가르치면 곧 두 종교 즉 카톨릭과 이슬람의 악한 협약이 드러나게되어 그 권위가 땅에 떨어지게 되기 때문에 철저하게 역사를 왜곡하고 성경을 금서 목록에 두고 거짓 역사를 기록하여 사람들을 기만해 왔다.

교황청과 아랍군의 정교 조약에 터키를 카톨릭에 양보하는 것으로 했지만 터키에서 일어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다시 유럽 전체를 뒤흔들면서 위세를 떨치게 되었고 그 들은 약 8시 동안 큰 제국을 구축하고 이슬람교를 신봉하면서 유럽 전체를 지배하였다.

 

출처 : 에스라 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