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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교4

다잘난시대 2016. 11. 28. 12:25

이슬람교의 기원과 실상을 밝힌다 4 세상읽기

2004.12.28.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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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교의 기원과 실상을 밝힌다 

 

노우호 목사님

   

13세기 말 이후 셀주크 투르크에 대신하여 소아시아(아나톨리아)를 중심으로 형성된 투르크족의 이슬람 국가(1299~1922)는 오스만 1세가 건국하였으므로 이렇게 부른다. 부르사를 공략하여 소아시아 지방을 거의 통일하고(1326), 아드리아노플(에디르네)을 점령하고(1362), 코소보 전투에서 발칸 여러 나라의 동맹군을 무찔렀으며(1389), 나아가서 니코폴리스에서 유럽 여러 나라의 십자군을 격파(1396), 발칸의 대부분을 병합하였다. 그러나 서진(西進)하여 온 티무르군에게 앙카라에서 패하여(1402), 그 진격은 한때 멈추는 듯하였으나 메메드 2세 때에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 공략에 성공함으로써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 수도를 아드리아노플에서 이곳으로 이전하였다(1453).

결국 예루살렘 땅은 1516년 12월 말에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셀림 1세가 시리아에 있는 맘루크 왕조의 세력을 꺾고 예루살렘을 그 지배하에 두었다. 현존하는 성벽의 대부분은 터키령이 되고 난 뒤 술레이만 대제(재위 1520~1566) 시대에 축조된 것인데, 터키령 시대에는 차차 쇠퇴하여 19세기 전반에는 인구가 약 1만 1천 정도로 감소하였다.

이후 셀림 1세는 이란, 시리아, 아라비아를 제압하고 이집트를 정복하여, 마지막 아바스왕조로부터 칼리프 칭호를 물려받아 이슬람교의 종주권을 장악함으로써, 술탄 칼리프제를 확립하였다(1517). 쉴레이만 1세 치하(治下)에 극성기에 달하여, 영토는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3대륙에 걸쳤으며, 그 군대는 한때 빈(오스트리아)까지 육박하였다(1529).

그러다가 마르틴 루터가 등장하면서 역사는 또 다른 국면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이어서 칼빈이 나오고 쯔윙글리 위클리프 죤 허스 등 개혁자들이 일어나게 되자 이슬람과 카톨릭 두 종교는 다 바짝 긴장을 하게 되었고 카톨릭 쪽에서는 익나티우스 로욜라가 일어나 반개혁의 기치를 들고 교황청을 비호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다져 나가더니 결국 오늘날 스페인의 예수회가 되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예수회는 예수 없는 예수회라고 그들은 언제나 세계 역사의 배후에서 흉계를 꾸미는 사람들로 알려져 있다.

오스만 트루크 제국은 국내에서는 군사적 봉건제에 입각한 국가체제를 확립하고, 법률, 학예, 건축, 공예 등 각 분야에 걸쳐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으나, 17세기 이후로는 점점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17세기 중기에 전체주의적 개혁에 의하여 질서를 회복, 강경한 외교정책을 펴서 한때 부흥하였으나, 제2차 비엔나 포위공격에 실패(1683)하고부터는 오스트리아, 러시아, 폴란드 등 열강의 진출이 활발하여 17세기 말에 헝가리의 대부분을 오스트리아에, 18세기 후반에는 흑해 북안을 러시아에 빼앗겼다. 19세기에 들어서자,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1789~1801)을 계기로 열강의 압력은 더욱 격화되어 그리스의 독립, 이집트의 이탈, 프랑스의 알제리 점령, 영국의 아덴 점령 등이 잇달아 일어났다. 아메드 2세(재위 1803~39) 이후 19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의 "탄지마트"에는 근대화정책이 추진되어 신앙, 출생의 구별없이 생명, 재산을 보장하는 일, 과세의 공정화, 재판의 공개, 군제의 개혁 등이 공약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유럽의 표면적인 모방에 그쳤기 때문에 효과는 거두지 못하였고, 그 후 러시아-투르크 전쟁에 대패함으로써 유럽 영토의 대부분을 상실하였다.

이에 유럽 문명의 영향을 받은 지식인들은 전제군주 압둘 하미드 2세에게 강요하여 근대적 , 자유주의적 헌법을 발포하게 했다(1876). 그러나 술탄은 이듬해 이 헌법을 정지시키고 절대주의적 전제정치를 강행하게 되자, 1908년 이에 반대하는 청년 장교들이 청년 투르크 당(黨)을 결성하고, 군대의 압력으로 술탄에게 헌법, 의회정치의 부활에 동의하게 했다. 이것이 청년 투르크당의 혁명이다. 이후 청년투르크당 내각이 조직되었고, 그 정권하에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 독일측에 서서 싸웠으나 패하였으며, 그 결과로 가혹한 세브르 조약에 조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1920). 그러나 이 조약은 오스만 투르크의 독립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었으므로 케말파샤 아타튀르크는 터키 대국민의회를 소집하고, 1922년 11월 술탄 정부의 폐지를 선언함으로써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멸망하였다.

한편, 19세기 중엽부터는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이 터키에 압력을 가하여 이 곳의 성지 보호에 주력하기 시작하였다. 제 1차 세계대전 말기에 터키군이 패퇴하고 앨런비 장군이 거느리는 영국군이 이곳을 점령하였으며 1920년부터 팔레스타인이 영국의 위임 통치 하에 들어가자 그 수도가 되었다. 그 후 대전 중의 밸푸어 선언에 따라 유대교도의 이민이 격증하였으며, 아랍족과 마찰을 일으키게 되었다.

1948년 팔레스타인의 유대교도와 아랍 각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으며, 그 이듬해 2월에 이스라엘 국가 성립하였다. 이에 따라 예루살렘은 요르단과 이스라엘이 동서로 양분하여 각각 한 쪽을 영유하였는데, 1967년 6월의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아랍 국가들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의 동부마저 점령해 버렸다. 그러나 아직도 예루살렘 그 성전 산에는 유대교 성전이 아니라 이슬람 사원이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되고 보면 이제는 그 예루살렘이 교황청의 소유가 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슬람교의 소유가 되지도 못했고 교황청이 그렇게 없애 버리려고 했고 아랍사람들이 그렇게 박해했던 유대인들이 거의 다 차지하게 되었다. 다만 성전이 있는 그 거룩한 곳만 아직도 이방인들의 발 아래 밟히고 있는 것이다.

인구 약 70만 정도의 예루살렘 1967년 6월 중동전쟁 이후로 유대교도, 그리스도교도, 이슬람교도가 저마다 성지(聖地)로 받들고 있는 동쪽 지역도 이스라엘의 점령지이다. 사해(死海)로부터 25km, 지중해 연안으로부터 55km, 높이 790m 가량의 팔레스타인 중앙산맥의 분수령상에 있는데, 지중해성 기후와 사막기후의 영향을 두루 받기 때문에 북위 31°41'에 위치하지만 겨울에는 몹시 춥고 봄, 가을에는 이따금 37 ℃의 더위를 겪는다.

한편 1910년 경에 포르투칼에서는 사회주의 운동이 나타나면서 도처에 붉은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로마 카톨릭 교회는 큰 난관에 봉착하였다. 사회주의자들은 종교를 인민의 아편으로 악선전하면서 포르투칼에서 카톨릭을 제거하려 하였다. 그래서 교황청에는 포르투칼 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 확산되는 공산주의를 막아 내려면 마리아가 나설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고 위대한 쇼를 준비했다.

그 유명한 사건이 마호메드의 딸의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포르투갈 산타렘주(州) 빌라노바데오렘에 있는 파티마 마을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1917년 5월부터 10월까지 매달 13일이 되면 3명의 어린 목동 앞에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 죄의 회개와 로자리오의 기도를 권하였다는 유래 때문에 순례지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정부는 목동들을 체포하고 순례를 금지시켰으나 1930년 레이리아의 주교가 이 사실의 신빙성을 인정하게 되면서 "파티마의 로자리오 성모"에 대한 숭앙은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지금은 대성당이 건립되어 해마다 많은 순례자들이 이 곳을 찾아 참배한다. 큰 십자가를 꼭대기에 꽂은 높이 65m의 탑이 있다.

파티마의 기적에 힘입어 교황 피우스 12세는 나찌 군대들에게 러시아와 정교회를 쳐 부수고 카톨릭 국가로 만들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제 2차대전이 끝난 후 교황 피우스 12세는 태양이 춤을 추는 것을 보았다는 거짓말을 지어내어 세상을 떠들석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한 기적을 목격한 사람은 교황 한 사람 밖에 없었다고 하는데도 순진하고 어리석은 카톨릭 신자들과 이슬람교 신자들은 이를 곧이 듣고 교황을 존경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회는 그 후에는 마리아가 중국에서 다섯 번 러시아에서 여러 번, 미국에서도 여러 번 나타났다고 떠들어 댔고 그 나라의 카톨릭 신자들은 마리아의 현현에 감동을 받아서 더 열심히 마리아를 숭배하게 하면서 무사히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위협에서 무사히 보존되었다.

수세기 동안 무슬림들이 포르투칼을 점령하고 있을 때 마호메드를 숭배한다는 뜻에서 한 지역이 이름을 파티마 즉 마호메드의 딸의 이름으로 불러 왔었다. 마호메드가 사람들에게 설교를 할 당시에 자신의 딸 파티마가 죽어서 낙원에 갔는데 거기 있는 여인들 중에서 가장 성스러운 여인으로 마리아 다음자리에 있다고 설교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무지한 이슬람교인들과 교활한 교황청의 수법은 결국은 사탄의 뜻을 이루는데 이바지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공산주의자들의 카톨릭에 대한 위협은 포르트칼에서 뿐만 아니라 스페인에서도 혹독하였다. 19세기 초부터 스페인은 정치적인 파란을 겪게 되었고 1868년 마침내 카톨릭 왕조가 무너지게 되었고 카톨릭계 여왕은 폐위되었다. 그래서 그 후 스페인은 잠시나마 공화국이 되었었다. 그러다가 1923년부터 다시 군주 정치가 부활하였고 정치적인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갔다. 스페인 정국은 혼란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고 다시 공화정으로 돌아가려 했을 때 교황청은 이에 격분하여 스페인의 카톨릭 교회로 하여금 반기를 들게 부추겼다.

스페인은 1931년부터 1936년 사이에 대통령이 다섯 번이나 바뀌었는데 이는 다 교황청의 카톨릭 농간에 의한 것이었다. 이에 스페인 정부는 카톨릭에 대하여 격분하여 스페인에 있는 카톨릭 교회에 세금을 부과하고 공립학교에서 신부나 수녀가 강의를 못하게 했다. 스페인 정부의 이러한 조치는 곧 교황청의 철저한 보복을 초래하게 되었다. 교황청은 그들의 도전을 결코 잊지 않고 있다가 철저하게 보복하였다.

이어서 교황청은 이슬람 지도자들을 불러서 옛날 예루살렘을 교황청에 넘기지 않은 빚을 갚을 것을 요구하였고 정교 조약을 내세우며 스페인 징벌을 요청하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일을 추진하는 데는 저 유명한 예수 없는 예수회 요원들이 나서게 되었고 그 일은 매우 빠르게 진행되었다.

불쌍은 스페인 국민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큰 불행을 당하게 되었다. 프랑코 장군의 지휘하에 수많은 아랍 군대가 모집되었다. 교황청은 스페인에게 본때를 보여 주어야 한다고 벼르고 있었다. 그리고 엄청난 재정을 지원하면서 이슬람 군대를 스페인에 파송하였다.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는 이 전쟁을 스페인 내전이라고들 떠들지만 이는 순전히 카톨릭 교회가 꾸며  이야기다. 언론을 동원한 교황청은 스페인을 공산주의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싸운 것처럼 떠들어 댔기 때문에 세상사람들은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는 전쟁이었다. 교황처의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인 이슬람 군대는 카나리 제도와 남부 스페인을 공격했다. 스페인 국민들은 페트로스 세거라 추기경이란 사람이 이슬람 군대를 지휘하면서 카톨릭을 거부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무차별 죽이는 것을 보고 전율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하여 교황청은 스페인을 완전히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다시 스페인은 교황청의 손아귀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는 예수회와 언론을 동원하여 교황청과 마리아가 도와서 스페인을 공산주의부터 해방시켰다고 떠들어댔다.

그 때 동원된 이슬람 군대는 약 400만명이나 되었다고 하니 그 때 스페인의 참상이 오죽했겠는가 ?

이 전쟁을 전후로 교황청과 이슬람교 사이에는 피하지 못할 조약이 들어 있는데 그것은 절대로 교황청이 이스라엘을 공식적인 국가로 인정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지금도 교황청은 이스라엘을 공식적인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어리석은 이슬람 교도들을 위한 예수회의 공작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수년 전에 이슬람교도인 무하마드 알리아카라는 사람이 교황을 저격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놀랍게도 교황은 허리 아래에 약간의 상처를 입었을 뿐이었다. 교황을 저격했던 무하마드 알리아카는 유럽의 청부살인자 중에서 뛰어난 저격수였는데 불과 9미터 앞에서 교황이라는 표적을 맞추지 못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는 교황을 죽이기 위한 저격수가 아니라 크게 다치지 않게 정교한 솜씨를 발휘해야할 사람으로 고용된 것이었다. 얼마 후에 교황은 마리아의 은총으로 건재하다는 소문이 세상에 퍼지게 되었고 온 세상의 카톨릭 교도들은 다시 한번 성모 마리아께 감사를 드렸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뉴스에 나오는 교황이 자신에게 총을 쏜 무하마드 알리아카를 용서하면서 입을 맞추었을 때 온 세상은 교황의 관용과 사랑에 감복하게 만들었고 온 세상의 이슬람 교도들은 교황에게 또 한번 크게 감사하면서 빚을 지게 만들어 놓았다.  그와 며칠 간격으로 미국의 대통령 로날드 레이건 역시 총격을 받게 되었는데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교황청에서 워싱턴 DC. 에 특사를 파송하면서 미국과 교황청이 급속도로 가까워지도록 정교한 연출을 한 그 뒤에는 언제나 예수 없는 예수회가 있고 그 뒤에는 그 간교하고 교활한 사탄이 조종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도 우리는 깨어서 교황청과 예수회 그리고 이슬람교와 적그리스도가 무슨 짓을 하는지 철저하게 감시를 해야 할 것이다. 특히 순진한 우리 성도들이 이러한 사람들의 농간에 휘말리지 않도록 성경과 역사를 바르게 가르쳐서 마귀의 수법에 유혹되지 않도록 주님의 양들을 지켜 나가야 한다.

 

출처 : 에스라 하우스